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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영웅전] 마담 롤랑

여자의 운명은 남편을 만나며 결정된다지만, 내가 보기에 남자의 운명은 한 아낙의 마음 먹기에 달린 것 같다. 아테네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의 말처럼 남자는 여자에 의해 몰락하고, 여자는 자식에 의해 몰락한다. 위대한 남자였든, 몰락한 남자였든, 그 뒤에는 여인이 있었다. 어머니의 경우가 가장 흔하고, 그다음은 아내이고, 그다음은 혈육이고, 그다음은 연인이거나 친구다.   프랑스혁명 와중에 부르봉 왕조의 법부대신은 장 마리 롤랑(1734~1793) 자작이었다. 활동적이라기보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그는 신부가 되고 싶었던 귀족이다. 아내 마리(1754~1793)는 몹시 적극적이고 드센 여자였다. 이 여인이 스무 살 연상의 남편을 대신해 지롱드당을 이끌며 흑막 같은 존재로 ‘지롱드파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뛰어난 미모와 지성 그리고 교양을 갖추고 있었지만,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귀족의 푸대접을 받으며 공화주의자가 됐다.   혁명과 함께 로베스피에르 치하에서 루이 16세 국왕이 처형되자 남편 롤랑은 도망치고 마담 롤랑 혼자 남았다. 5개월의 옥중 생활을 거친 뒤 단두대에 섰다. 처형 직전에 그는 문득 형리에게 종이와 연필을 달라고 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좋은 시상(詩想)이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형리가 그냥 죽으라는 말투로 핀잔을 주며 거절하자 마담 롤랑은 후세에 말로라도 전해 달라며 이렇게 읊었다.   “오! 자유여, 인간들은 너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지르는가?(Oh Liberty, what crimes are committed in thy name!)” 그리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틀 뒤 피난처인 노르망디에서 아내의 처형 소식을 들은 롤랑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권위주의 시대를 거친 뒤 민주화라는 미명 아래 자유가 넘쳐 마치 혼돈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 왜 자꾸 롤랑 부인의 말이 떠오르는지….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마담 롤랑 마담 롤랑 남편 롤랑 롤랑 부인

2024-11-03

[신 영웅전] 쇼팽의 무덤

1830년 11월 2일 폴란드 바르샤바역에서 한 소년이 기차에 올랐다. 이름은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이었다. 그 무렵 이미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의 명성을 얻어 연주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오스트리아 빈이었다. 그에게 고향에서 작은 소포가 배달됐다. 한 줌의 흙이 들어 있었는데, ‘이것은 조국 폴란드의 흙’이라 적혀 있었다.   쇼팽은 빈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프랑스 여류 소설가이자 사교계의 별인 조르주 상드(1804~1876)를 만나 모정과 애정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객지 생활의 고독과 우울에다 건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쇼팽은 폐결핵으로 쿨룩거리고 있었다. 연상의 상드는 어머니처럼, 아내처럼, 간호사처럼 쇼팽을 보살폈다.   이들의 행복한 세월은 9년이 지나 끝났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영국 런던에 도착한 쇼팽은 스코틀랜드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해는 유난히도 추웠다. 찬바람과 눅눅한 기후는 폐결핵을 앓던 쇼팽에게 극약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와 1849년 10월 17일 끝내 눈을 감았다. 39세였다. 임종 무렵 머리맡에는 19년 동안 들고 다닌 조국의 흙이 있었다. 마들렌 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쇼팽이 존경했던 모차르트의 진혼곡(Requiem)이 울려 퍼졌다. 유해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됐다. 쇼팽의 친구가 관 위에 한 줌의 폴란드 흙을 뿌려줬다.   며칠이 지나 바르샤바의 한 교회에서 쇼팽의 또 다른 장례식이 거행됐다. 관도 없이 자그마한 상자 하나만 매장됐다. 그 안에 쇼팽의 심장이 들어 있었다. 친지들은 쇼팽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심장만이라도 고국에 묻어줬다. 오늘이 쇼팽의 175주기다. 이런저런 행사가 이어지겠지만, 음악을 모르는 나에게는 그가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누가 말했던가. 예술에는 조국이 없다고….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쇼팽 무덤 프레데리크 쇼팽 폴란드 바르샤바역 조국 폴란드

2024-10-20

[신 영웅전] ‘삼민주의’ 쑨원

쑨원(孫文·1866~1925)은 중국 광둥(廣東)성 포산(佛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먹고살기 어려워 형 쑨메이(孫眉)가 먼저 하와이에 이민 가 어느 정도 성공하자 형을 찾아 태평양을 건넜다. 거기서 미국 민주주의와 영어를 일찍부터 배웠다. 4년 동안 살면서 종교 문제로 형과 뜻이 맞지 않아 귀국해 홍콩의학교를 졸업했다.   병원은 꽤 성황이었다. 어느 날 산보 삼아 홍콩의 영국인 공원에 갔다가 입장을 거절당했다. 경비원이 간판을 가리키는데 ‘개와 중국인은 입장할 수 없음(No dogs and Chinese allowed, 狗與華人不得入內)’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문득 “나는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나라를 고치는 의사’(國醫)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2년 만에 병원을 청산한 뒤 조국 혁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해가 청일전쟁이 일어난 1894년으로 28세 때였다. 신산한 삶을 거쳐 신해혁명(1911년)에 성공했으나 권력에 탐닉한 위안스카이(袁世凱)와의 내전이 임박하자 임시대총통의 기득권을 양보하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사이에 쑨원은 일본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 사회에 적응하려고 나카야마 키코리(中山樵)로 개명했다. 이때부터 중산(中山)이 그의 호로 굳어졌다. 한국인의 의식과는 아주 달랐다. 우리가 일제 시대의 이름을 이어서 썼더라면 어찌 됐을까.   1924년 중·일 갈등이 치열할 무렵 외과의사인 그는 몸의 이상을 직감했다. 암이었다. 살아서는 중국의 민주화와 자주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 강의를 시작했으나 네 번을 마치고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나머지를 유언 형식으로 후계자 장제스(蔣介石·1887~1975)에게 남기고 눈을 감았다. 민족·민권·민생을 역설한 '삼민주의(三民主義)'가 그것이다. 역사가 영웅주의로 흐르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역사는 결국 영명한 지도자의 발자취였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삼민주의 쑨원 역사가 영웅주의 후계자 장제스 종교 문제

2024-10-13

[신 영웅전] 맹손의 자식 교육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 노(魯)나라에 맹손(孟孫)이라는 세도가(勢道家)가 살고 있었다. 맹손은 사냥을 아주 좋아했다. 어느 날 부하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새끼 사슴을 잡아 진서파(秦西巴)를 시켜 집으로 가져오도록 했다.   진서파가 새끼 사슴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어미 사슴이 슬피 울며 따라왔다. 그 눈빛에 자식을 돌려 달라는 소망이 그토록 간절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착한 그는 어미 사슴의 모정에 감동해 새끼를 풀어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진서파가 집으로 돌아오자 맹손은 잡은 사슴을 가져오라 했다. 진서파는 그간의 사정을 보고하고 어미 사슴의 슬픔을 뿌리칠 수 없어 새끼를 돌려보냈노라고 대답했다. 그의 말을 들은 맹손은 크게 화를 내면서 그를 쫓아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석 달이 지나 맹손은 진서파를 다시 불러들여 자기 아들의 가정 교사로 삼았다. 많은 사람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느 날 맹손의 마부(馬夫)가 “지난날에는 진서파에게 죄를 물어 몰아냈다가 이제는 그를 불러 아드님의 스승으로 삼으시니 그 연유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맹손이 “진서파가 사슴의 새끼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했다면 항차 내 아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고 대답했다. (『한비자』, 『여씨춘추』)   누구인들 자식이 소중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찌 내 자식만 소중하겠는가. 학교 폭력으로 자살한 아이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자살한 담임 선생님도 누군가의 자식이며, 가슴 아파할 엄마와 아버지가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죽어야 하나. 나 자신을 포함해 모두 부모 잘못이며, 그 잘못의 뿌리에는 무지가 있다.   퇴계(退溪) 선생은 사랑(仁)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情)이 아니라 머리로 느끼는 이치(端)라고 했다. 밥상머리 교육이 사라진 이래 아버지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나라가 어지러워졌으니 모두가 내 탓이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자식 교육 자식 교육 누구인들 자식 새끼 사슴

2024-09-29

[신 영웅전] 부지런해 부자된 J P 모건의 집사

미국의 부호는 한국처럼 재벌이라는 이름으로 문어발식 경영을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카네기는 철강, 해리먼과 록펠러는 석유, 스탠퍼드는 철도, 모건은 유통(백화점)을 주력 기업으로 경영한다. 그 가운데 모건 상사의 2대 총수인 존 피어폰트 모건(1837~1913)은 호텔 경영에 성공하자 이후 은행(JP모건)에 주력해왔다.   어느 날 모건 2세가 오랫동안 데리고 있던 집사가 그만두고 여생을 편히 쉬고 싶다고 했다. 모건이 다른 사람을 찾았다. 모건이 집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사람이 응모했는데, 그 가운데 두 사람이 끝까지 경합했다.   모건은 둘 다 놓치기 아까워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은퇴하는 집사가 모건에게 말하기를 그 둘 가운데 한 명은 자기가 집사로 채용하겠노라고 말했다. 모건의 집사는 집사 일을 하면서 큰 부자는 되지는 못했지만, 집사를 두고 여생을 보낼 만큼의 돈은 벌었다.   그가 모건이 채용하려는 집사를 고용하고 살 만큼 재산을 축적하기까지 얼마나 근검절약했을까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물론 미국은 자본주의의 천국이고, 그래서 능력껏 발전할 수 있는 풍토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집사는 가난을 모면하고 싶은 우리에게 하나의 교훈을 주고 있다.   한국사회는 부자들이 돈을 풀어야 하는데, 높은 상속세 때문에 탈세하고 돈을 은닉한다. 이런 나의 논조가 부자를 옹호한다는 비난을 듣는 것을 잘 알지만, 지금 우리에게 자본주의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는 우월한 선택임도 사실이다. 거창한 이론이 필요 없이 모건의 집사가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사마천의 말처럼 큰 부자는 하늘이 내지만(大富在天),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小富在勤)에서 온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부자 모건 피어폰트 모건 철도 모건 모건 2세

2024-09-15

[신 영웅전] JP 모건의 집사

미국의 부호는 한국처럼 재벌이라는 이름으로 문어발식 경영을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카네기는 철강, 해리먼과 록펠러는 석유, 스탠퍼드는 철도, 모건은 유통(백화점)을 주력 기업으로 경영한다. 그 가운데 모건 상사의 2대 총수인 존 피어폰트 모건(1837~1913)은 호텔 경영에 성공하자 이후 은행(JP모건)에 주력해왔다.   어느 날 모건 2세가 오랫동안 데리고 있던 집사가 그만두고 여생을 편히 쉬고 싶다고 했다. 모건이 응낙하고 다른 사람을 찾았다. 모건이 집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사람이 응모했는데, 그 가운데 두 사람이 끝까지 경합했다.   모건은 둘 다 놓치기 아까워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은퇴하는 집사가 모건에게 말하기를 그 둘 가운데 한 명은 자기가 집사로 채용하겠노라고 말했다. 모건의 집사는 집사 일을 하면서 큰 부자는 되지는 못했지만, 집사를 두고 여생을 보낼 만큼의 돈은 벌었다.   그가 모건이 채용하려는 집사를 고용하고 살 만큼 재산을 축적하기까지 얼마나 근검절약했을까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물론 미국은 자본주의의 천국이고, 그래서 능력껏 발전할 수 있는 풍토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집사는 가난을 모면하고 싶은 우리에게 하나의 교훈을 주고 있다.   한국사회는 부자들이 돈을 풀어야 하는데, 높은 상속세 때문에 탈세하고 돈을 은닉한다. 이런 나의 논조가 부자를 옹호한다는 비난을 듣는 것을 잘 알지만, 지금 우리에게 자본주의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해방 이후 3년의 미군정을 겪으면서 운명적으로 찾아온 속지(屬地)주의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는 우월한 선택임도 사실이다. 거창한 이론이 필요 없이 모건의 집사가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사마천의 말처럼 큰 부자는 하늘이 내지만(大富在天),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小富在勤)에서 온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JP 모건 피어폰트 모건 철도 모건 모건 2세

2024-09-15

[신 영웅전] 알래스카 매입한 수어드 국무장관

학교를 28개월만 다닌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1년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동부 귀족들의 냉대가 심했다. 그를 도울 막료조차 찾기 어려웠다. 링컨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윌리엄 수어드(William Seward·사진)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수어드는 뉴욕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지낸 거물이었다.   그 무렵 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 이기고도 빚에 쪼들리는 입장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7000㎞ 떨어진 알래스카를 다스릴 의지도 여력도 없었다. 언제인가는 건설해야 할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공사비도 부족했고, 어차피 알래스카는 영국령 캐나다에 합병될 운명이라며 체념하고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영토가 탐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알래스카를 차지하면 적국인 영국(캐나다)을 포위하는 효과도 있어서 전략적 가치가 작지 않았다. 알래스카의 광물 매장량이나 어족 자원은 당시에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알래스카 매매 의중을 드러내자 수어드는 재빨리 링컨 대통령과 상의하고 매입을 서둘렀다. 면적 172만㎢에 가격은 720만 달러였으니 평당 0.014센트였던 셈이다.   그런데 의외로 상원의 반대라는 난관에 부딪혔다. 그들은 “수어드의 냉장고(Seward‘s icebox)를 왜 사야 하느냐”면서 “수어드의 바보짓(Seward’s folly)”이라고 빈정거렸다. 수어드는 우선 자기 돈으로 알래스카를 매입하는 계획도 생각해 봤으나 링컨이 반대하고 자금 사정이 만만치 않자 상원의원을 매수하기로 했다.   마침 자본이 다급했던 주미 러시아 공사(E. von Stoeck)가 매수 자금을 빌려줬고, 상원을 설득해 매입에 성공했다. 링컨은 알래스카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암살되는 바람에 공로는 다음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지도자의 자질은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다. 그는 중국 상하이 총영사(조선 공사 겸임)를 지낸 조지 수어드의 형이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알래스카 국무장관 수어드 국무장관 알래스카 매매 윌리엄 수어드

2024-09-09

[신 영웅전] 에이브러햄 링컨

아마도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은 역사가 자기를 잘못 평가하고 있다고 구천에서 투덜거릴 것이다. 링컨이라면 노예 해방부터 떠올리지만, 역사의 평가는 다르다. 노예 해방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역사가들은 그가 전쟁이 끝난 뒤 적의(敵意)에 가까운 남북을 통합해 대제국을 건설한 ‘건국의 중부(仲父)’라는 데 더 큰 의미를 둔다.   켄터키의 촌뜨기로 태어난 링컨은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해 겨우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지만, 인자한 계모의 사랑을 받으며 성실하게 공부했다. 역사상 처음 고졸 출신으로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상류 사회의 푸대접을 많이 받았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볼이 움푹 팬 링컨은 추남이었다. 대선에 출마하자 선전 포스터를 찍으려던 사진사가 그 얼굴을 보고 절망했다. 그때 베델이라는 소녀가 편지로 “아저씨는 수염을 기르면 못생긴 얼굴을 좀 가릴 것 같다”고 아이디어를 줬다.   듣고 보니 그럴듯해 그때부터 수염을 기르니 ‘송장 같던 얼굴’이 우아하게 보였다. 물론 수염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그 덕을 톡톡히 봤는지 대통령에 당선됐다. 링컨 때부터 미국 대통령은 수염을 기르는 것이 관례가 됐다.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이던 1863년 11월 19일 그는 격전지 게티즈버그에서 전몰장병 추모 연설을 했다. 본디 연사는 하버드대 총장 에드워드 에버렛이었다. 그는 2시간에 걸쳐 사자처럼 열변을 토했다. 주최 측에서 오신 김에 한 말씀 해달라는 부탁이 있어 링컨은 쪽지에 몇 마디 적어뒀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신 그 전 일요일 교회에서 들은 목사님 설교가 머리에 떠올라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끝맺고 내려왔다. 267단어다. 연설이 너무 짧아 마그네슘 플래시를 장착하던 사진사가 꾸물거리다가 사진 찍을 여유도 없었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에이브러햄 링컨 에이브러햄 링컨 노예 해방 대통령 자리

2024-09-02

[신 영웅전] 식민 전문가 크로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식민 통치의 성공 모델로 여긴 인물은 크로머 경이었다. 본명은 에벌린 배링 크로머(1841~1917)였다. 독일계 이민의 후손인데, 가문은 영국에 정착해 금융업으로 크게 성공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그리스의 코르프 주둔군 포병대에서 근무하면서 고대 그리스·로마·이집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크로머는 다시 육군참모대학을 졸업한 뒤 전쟁성에 들어가 크림전쟁(1853~1856년)의 전후 처리 문제에 관여했다. 인도 총독 노스브루크(Northbrook) 백작의 비서로 봉직하면서 최고훈장을 받았다. 크로머는 온유함과 잔혹함을 겸비한 수재였다.   1877년 크로머는 이집트의 금융 위기를 타개하고 대영 항쟁을 진압하기 위한 특수 임무를 갖고 카이로영사관에 영사로 부임했다. 그는 미국 남북전쟁의 호기에 이집트 면화를 수출해 이집트의 금융 위기를 해결했다.   그뿐 아니라 수에즈 운하 건설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처럼 탁월한 능력을 보이자 영국은 크로머를 이집트 책임자(1883~1907)로 임명했다. 그의 공식 직함은 이집트 주재 총영사(Controller-General in Egypt)였다.   크로머에겐 식민지 통치 원칙이 있었다. 차관(借款)으로 약점을 잡은 다음 식민지 백성을 배부르게 해 복종시키고(full-belly policy), 세금을 낮춰 민심을 사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집트를 수탈하면서도 가책을 느끼기보다는 백인의 의무라 여겼다.   크로머는 논리적인 프랑스나 권위주의적인 독일은 이런 일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포만(飽滿) 정책’은 이토의 유훈이 되면서 일제의 조선 통치에 근간이 됐다. 1920년대 한국인의 경제 수준은 1950년대보다 높았다. 지금도 이집트인들이 영국에 가는 것은 관광이나 학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크로머의 무덤에 침을 뱉으러 간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전문가 식민 식민 전문가 식민지 통치 식민 통치

2024-08-25

[신복룡의 신 영웅전] 왕양명의 정치 비판

왕희지(王羲之)의 후손인 왕수인(王守仁·1472~1528)은 저장(浙江)성 콰이지(會稽) 출신으로 호가 양명(陽明)이다. 17세에 장가가는 날 어느 고명한 선생을 만나 학문을 배우다가 장가가는 것도 잊고 다음 날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무과에 급제해 촉망받았으나 환관의 잘못을 비판하다가 변방의 역참(驛站) 관리로 좌천됐다. 3년 만에 병부에 복귀해 두 번의 반란을 평정했다.   전선의 별빛은 인간을 고뇌하게 만들고, 그 고뇌에서 철학이 나온다. 그래서 무인 중에 철학자가 많고, 조선 왕조의 이름 있는 현판 중에는 무인의 글씨가 많다. 그는 남들처럼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미심쩍은 점이 많았다.   특히 왕실에서 『주자대전(朱子大全)』으로 과거를 치르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주자는 『대학』을 편집하면서 ‘백성을 사랑하라’(親民)는 구절은 비슷한 글자를 잘못 읽은 것이라며 ‘백성을 가르치라’(新民)로 바꿔 해석했는데, 이를 두고 왕양명은 ‘그 바람에 주자가 선비들의 입을 막았다’고 비판했다. 왕양명은 “허다한 진리를 어찌 그대만 알고, 그대만 옳은가”라며 주자에 항명하니 후세가 이를 양명학이라 불렀다.   그의 제자들이 『전습록(傳習錄)』을 지어 후대에 남겼다. 제자들이 “왜 세상이 이토록 어지럽습니까”라고 여쭈니 왕양명은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학문을 바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天下不治 學術不明)”이라며 정치인들을 나무랐다. 그러면서 왕양명은 아는 것과 행실이 같지 않은 무리를 경계했다.   지금 한국 정치는 해방 정국보다 나을 것이 없다. 정치인이 공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회도서관 대출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어를 전공한 어느 국회의원이 “대통령이 비서진을 호가호위(狐假虎威)한다”며 사자성어를 잘못 사용했다. 듣고 있는 국민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이 나라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복룡의 신 영웅전 왕양명 정치 정치 비판 한국 정치 호가 양명

2024-07-28

[신 영웅전] 모세의 생애와 달력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갖는 의문은 인물들의 나이가 700~900세로 기록된 점이다.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세라가 969년을 살았다는 기록(창세기 5 : 21-27)은 그 가문의 몇 대를 합산해 그렇다는 것이니 의심해 시비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모세는 120세에 세상을 떠났다(신명기 34 : 10). 원시시대에는 그것이 가능했다.   태초의 달력은 월력(月曆)이었다. 중동은 상하(常夏)의 계절이기 때문에 태양력이 없었고, 주기와 시각 효과가 뚜렷한 월력을 사용했다. 그래서 달 모양이 바뀌는 스무여드레를 한 달로 정했다. 수학과 상술이 발달한 아랍인들이 일수(日收) 이자를 받기 위해서였다. 달력을 뜻하는 ‘Calendar’의 어원은 ‘셈하다(cal)’와 ‘빚(lend)’에서 유래했다.   상하의 중동 문화가 사계절이 뚜렷한 라틴 문화권으로 옮겨 오면서 태양력이 필요했다. 그 당시의 1년은 십진법에 따라 10개월이었다. 손가락이 열 개였기 때문이다. 1월은 군신(軍神·Mars)을 기념해 March였고, 10월은 10의 어근인 Deci를 써 December였다. 그런데 10개월을 1년으로 삼으니 절후가 맞지 않았다. 그리스 왕 솔론이 야뉴스(Janus)를 뜻하는 1월(January)과 정화(淨化)를 의미하는 Februa를 딴 2월(February)을 더해 1년을 12개월로 만들었다. 그래서 원래 1월이던 March가 3월이, 8월 October가 10월이, 10월 December는 12월이 됐다.   이 셈법에 따르면 모세의 120세는 28일×10월×120년=3만3600일인데 현대력으로 환산해 3만3600÷365=92세다. 이런 계산은 과학을 내세워 종교나 신학을 공격하는 불신자나 무신론자를 입막음하려다 보니 내세운 것이라 과학으로 따질 일은 아니다. 과학으로 남김없이 설명하려면 신학은 신성을 잃기 때문이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생애 달력 라틴 문화권 중동 문화 수학과 상술

2024-07-07

[신 영웅전] 하멜 일행

1653년(효종 4년) 8월 16일 제주도 대정리 산방사 앞바다에 표류하던 네덜란드 상선이 도착했다. 헨드릭 하멜(1630~1692)을 비롯한 64명이 그 배에 타고 있었다. 상륙하면서 28명이 죽고 36명이 구조됐다. 조선 땅에서 14년간 노예처럼 생활하다가 8명이 1차로 탈출해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 남원과 순천에 잔류했던 8명은 네덜란드가 일본 막부 정권을 통해 조선 조정에 호소해 2차로 귀국했다.   생존자 36명 가운데 16명이 귀국하고 일부는 병으로 죽었지만, 얀 클라츠 등은 귀국을 거부하고 한국인과 결혼해 처자식을 두고 조선에서 일생을 마쳤다. 물론 처자식을 두고 매정하게 귀국한 사람도 있다. 남은 사람들은 천민과 결혼했으므로 그 뒤의 혈족이 어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네덜란드 표류자들과 조선인의 자녀는 한국인과 서양인 사이에 태어난 최초의 혼혈이다. 이들은 지금 우리와 함께 섞여 살고 있다.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건을 비롯해 혼혈은 한국사에 허다하다.   이민을 주제로 한 글에서 하멜 표류기를 거론하는 이유는 민족은 오직 핏줄뿐인가 하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고전파 민족주의자들은 핏줄을 민족의 첫째 구성 요소로 거론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인 2세로서 한국어 실력이 8학년의 수준에 이르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사는 이들을 동포 또는 민족이라 한다.   이에 따른 구별로 보면 언어를 잊은 다른 국적의 형제는 그저 혈연일 뿐 민족이 아니며, 차라리 우리와 고락을 함께하며 같은 문화와 언어를 쓰는 사람이 동포가 아닐까.   절망적인 ‘인구 절벽’ 앞에서 근거도 없는 순혈주의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단군은 역사로서 국조(國祖)일 뿐이지 학술적으로 보면 한국은 26개 민족이 이룬 사실상 다민족 사회다. 이민을 받을 것인지, 국가 쇠락의 길로 갈 것인지 결심할 순간에 왔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하멜 일행 하멜 일행 하멜 표류기 헨드릭 하멜

2024-06-23

[신 영웅전] 구내공의 여섯 가지 후회

나이가 들다 보니 앞날을 걱정하고 구상하기보다는 지난날을 돌아보는 일이 더 많다. 뒤돌아본다고 해서 아름다운 추억만 떠오르는 것은 아니요, 후회하고 아쉬웠던 일이 더 많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여한을 줄이는 것인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결심할 순간에 독하지 못했던 일, 결단의 순간에 멈칫거렸던 일, 더 베풀었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그래서 이 세상을 마치는 날 사람들은 아름다운 추억보다 아쉬움을 토로한다.   중국 송나라에 재상 구준(寇準, 961~1023)이 있었다. 내국(萊國)의 제후로 봉해진 까닭에 구내공(寇萊公)으로 불렸다. 시인으로도 유명했지만 정치가로서도 인망을 받았다. 태종 때에 대리평사(大理評事)와 추밀원 직학사(直學士) 등을 지내면서 강직한 성품으로 직간을 잘해 태종이 당나라 명신이었던 위징(魏徵)에 견주어 칭송했다.   구내공은 인생 말년에 지난날을 돌아보며 ‘여섯 가지 후회(六悔銘)’라는 글을 남겼다. 그에 따르면 관리로서 부정(不正)해 권세를 잃었을 때(官行私曲失時悔), 잘살 때 검소하지 않아 가난해졌을 때(富不儉用貧時悔), 젊어서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아 시기를 넘겼을 때(學不少勤過時悔), 일을 보고 배우지 않다가 쓸 일이 생겼을 때(見事不學用時悔), 술 취해 함부로 말하다가 술 깼을 때(醉後狂言醒時悔), 편안할 때 몸을 돌보지 않아 병들었을 때(安不將息病時悔) 후회했다.   누구나 위 여섯 가지 후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일생을 보낸 터가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주변을 돌아보면 젊어서 공부하지 않은 것을 가장 많이 후회하더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지만, 그래도 공부는 열심히 하고 볼 일이다. 그다음이 건강을 돌보지 않은 후회였다. 후회에는 약이 없다는 것이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 그러나 후회에는 늦음이 없더라.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구내공 후회 가지 후회 재상 구준 인생 말년

2024-06-03

[신 영웅전] 유엽의 충고

촉한(蜀漢)의 건흥 4년(서기 230년), 전란에 피로해지고 건강마저 잃은 제갈량이 허술한 틈을 보이자 위나라 대장군 조진(曺眞)이 황제 조예(曺叡)에게 촉을 공략할 것을 아뢰었다. 이에 조예가 장사(長史) 유엽(劉曄)에게 의견을 물으니 좋은 계책이라고 대답했다. 조예가 기뻐하며 그러리라고 결심했다. 그런데 유엽이 대궐을 나오자마자 동료 신하들이 황제가 촉을 치기로 했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난감한 유엽은 그런 일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그러자 대신들이 황제를 찾아가 “황제는 촉을 공략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하고 유엽은 그런 일이 없다 하니 군신 사이에 어찌 이렇게 말이 다를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당황한 황제는 유엽을 불러 “방금 촉을 치기로 나와 약조해 놓고 이제 신하들에게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하니 어찌 된 일이오”라고 책망했다. 그러자 유엽이 대답하기를 “지금은 촉을 칠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조예는 그 뜻을 알고 신하를 물리친 다음 다시 촉을 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제야 유엽이 대답하기를 “한 나라를 침공하는 일은 국가의 대사인데 알아야 할 사람이 있고, 몰라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폐하께서는 그 중차대한 사실을 저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흘리셨습니까. 무릇 병법은 속임수입니다(夫兵者 詭道也). 그러하오니 주군은 마땅히 입이 무거워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크게 후회하며 언행을 조심했다. (『삼국지』 99회)   지금 한국 정치는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대통령과 야당 당수가 만나 할 말 못할 말을 나눴을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정신 나간 사람들이 나타나 “우리가 그 자리를 주선했다”고 기자 회견을 했다. 인간의 공명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남자는 모름지기 입이 무거워야 하는데 세상이 어지럽다 보니 별짓을 다 보겠다. 이후락의 말처럼 밀사는 입이 없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유엽 충고 황제 조예 위나라 대장군 부병자 궤도

2024-05-19

[신 영웅전] 키케로의 삶과 죽음

재능만 따진다면 고대 로마사에서 가장 출중한 인물은 키케로(BC 106~BC 43)였다. 수재로 만권 서적을 읽었다. 수재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한 학부모들이 학교에 찾아가 그를 지켜봤다. 키케로는 역사학자가 되어 『로마사』를 집대성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수사학에 빠진 그는 자기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겨 그리스에 유학한 뒤 변호사가 됐다. 로마 시민들의 이름과 규모가 큰 토지의 시세와 물주를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그는 변호사가 되든, 정치가가 되든 부동산 큰 손이 되는 것이 제일이라 확신했다.   송사는 되도록 위험하고 큰 사건을 맡았다. 피고를 변론하다가 원고가 변호비를 더 주면 거침없이 갈아탔다. 많은 돈을 벌자 집정관에 거뜬히 당선돼 ‘로마의 국부(Pater Patriae)’라는 칭호를 들었다. 위증과 매수에 거리낌이 없었다. 선거에서는 정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돈다발을 흔들며 더럽게 대드는 쪽이 이긴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키케로가 정적을 공격하는 연설에는 독이 묻어 있었다. 정적을 공격하는 연설문의 몇 가지 매뉴얼을 만들어 이름만 바꿔 넣었다. 변호사인 그가 살린 사람보다 그의 독설에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감형해 주면 고맙게 여기기보다 원한만 더 깊어진다.” 주변에서 어제와 오늘의 말이 왜 다르냐고 물으면 “내 화술은 로마 시민을 설득할 능력이 있다”고 장담했다. 그의 아내 테렌티아가 더 설쳤다.   그러나 키케로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를 변론한 것이 실수였다. 그가 살려준 노예의 밀고로 은신처가 드러나 안토니우스가 보낸 백인대장의 도끼에 목과 손이 함께 잘렸다. ‘부동산업자는 원수진 사람의 손에 죽지 않고 자신의 손에 죽는다’(크라수스). 정권에 붙은 그의 아내는 밀고한 노예에게 “자기 살을 베어먹는 것으로 연명하라”는 형벌을 내렸다. 2000여 년 전 남의 나라 이야기인데 낯설지 않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키케로 죽음 고대 로마사 로마 시민들 밀고로 은신처

2024-04-14

[신 영웅전] 이완용의 파묘

조상 묘지를 이장(移葬)하는 문제를 둘러싼 영화가 화제다. 여러 말이 많지만, 뒤에는 산이 병풍처럼 가려 바람을 막아주고 앞에 고요히 냇물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 풍광은 나쁠 이유가 없다. 기독교 문명권에서는 풍수지리설을 미신이라 치부하지만, 장묘문화는 일종의 자연지리학이다.   파묘(破墓)의 대표적 사례는 이완용(1858~1926)이다. 수재는 재승박덕(才勝薄德)하다더니 그가 그랬다. 명문가의 벌족으로 재산 많고 공부도 많이 했다. 선악 문제를 떠나 그 시대에 시류를 가장 정확하게 읽은 인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닮고 싶은 사람으로 여겼던 그는 남보다 먼저 영어를 익혀 외교관의 등용 무대인 ‘정동 구락부’의 스타가 됐다.     그는 애초 친러파의 선두 주자였다가 러·일 전쟁의 말로를 보면서 곧 친미파로 변신했다. 그러나 학부대신을 지내면서 구미 사조에 눈뜨자 미국이 조선을 끝까지 지켜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간파하고 다시 친일파로 선회했다. 송병준(宋秉畯)이 이토 히로부미와의 매국 흥정에서 기선을 제압하자 이완용은 자신이 추월당하고 있다는 초조감에 한일병합조약을 먼저 서둘렀다.   그토록 영리한 사람이 매국노의 말로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그는 당대 최고의 풍수사에게 부탁해 전북 익산 미륵산에 실묘(實墓)를 만들고 여섯 곳에 가묘(假墓)를 만들었다. 장례 행렬의 만장(輓章)이 10리에 이르고 고종 이후에 가장 화려했던 그도 끝내 역사의 지탄을 비껴가지 못했다.   그러자 문중에서 1979년 파묘하고, 인근 대학 박물관에서 관과 유품을 구매했으나 구설에 오르자 그나마 처리했다. 절손(絶孫)되자 입양했다. 이완용은 그토록 좋은 명당에 묻혔는데 왜 집안은 멸문했을까. ‘네가 살아서 덕을 남기지 않으면 그 땅이 너를 토해 내리라’. (『구약 성경』 레위기 18 : 28, 20 : 22)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이완용 파묘 이토 히로부미 선악 문제 기독교 문명권

2024-03-31

[신복룡의 신 영웅전] 김부식의 주택론

경제학의 ‘슈바베의 법칙’에 따르면 생계비에서 주거비용 지출이 많을수록 삶이 곤궁하며, 이런 현상은 빈곤층일수록 더 심하다. 그렇다면 부자들은 슈바베 지수가 낮다는 뜻인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누구는 집값이 150억원이고, 누구는 봄철 내부 수리비가 72억원이 들었다는 기사에 서민의 억장이 무너진다. 언제인가 나는 부잣집에 갔다가 화장실에 다녀온 후 방을 못 찾은 기억이 오래 남아 있다.   부자든 가난뱅이든 주거비가 높은 것은 한국의 특징이다. 집값이 높고, 특히 담장과 대문 건축비는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 대문을 아홉 번 지나가야 주인마님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주거가 삶의 편의가 아니라 신분의 허세이기 때문이다. 이미 고려 건국공신 최승로(崔承老)는 우리 민족은 집에 너무 많은 돈을 쓴다는 걱정을 982년에 남겼다.   호화 주택 문제를 가장 뼈아프게 지적한 인물은 고려 중기 문신 김부식(金富軾·1075~1151)이다. 그에 관한 평가는 말이 많지만, 그가 저술한 『삼국사기』 덕분에 그 시대사를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이던 경순왕의 후손인 그는 백제를 그리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백제 온조의 저택(궁궐)을 논하면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아름답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儉而不陋 華而不侈)’고 기록했다.   현대 경제학에서 말하는 주거의 정도는 식구 한 명에 5평, 4인 가구라면 30평 정도면 불편하지 않다. 일본 재벌 마쓰시타(松下)의 창업주는 평생 2층 다다미의 작은 단독 주택에 살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런 권고는 별로 의미가 없다. 주택난 때문에 신혼부부가 25년을 벌어야 빚 없이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혼기와 출산을 늦추고 출산율 절벽 현상이 초래됐다. 주택 정책의 실패가 한국 경제에서 만악의 근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권은 무능하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복룡의 신 영웅전 김부식 주택론 주거비용 지출 현대 경제학 한국 경제

2024-03-17

[신 영웅전] 호찌민의 유산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 내렸을 때 나의 심정은 죄스러움이었다. 전쟁의 참화는 슬프다. 3만 명의 ‘라이따이한’은 아빠가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고, 그들의 엄마는 “내가 당신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60을 넘긴 라이따이한들은 ‘전쟁의 혼혈’이라며 냉대받아왔다. 우리가 거두어줘야 할 ‘상흔’인데 한국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아무런 적개심을 보이지 않고 웃음으로 맞아주는 그들이 더 무서웠다.   호찌민(胡志明·1890~1969)은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고아였다. 21세에 프랑스로 밀항해 30년 동안 파리·런던·뉴욕에서 고생했다. 내가 보기에 현대사에서 칭송받을 만한 정치인은 세 명이다. 입던 옷과 물레, 안경 두 쪽만을 남기고 떠난 마하트마 간디(1869~1948), 우리와의 은원을 떠나 살아서는 자식도 없었고 죽어서는 한 점 재도 없는(生而無後 死不留灰)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그리고 호찌민이다.   호찌민은 1945년 베트남 초대 주석에 취임했다. 독신으로 살며, 프랑스 식민지 시대 총독 관저 전기기술자의 숙소에서 평생 살았다. 죽으면서 “장례를 간소히 하고 어떤 기념물도 세우지 말고, 시신은 화장해 남북 베트남 산하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 그의 유산은 성철(性徹) 스님의 것보다 많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 국민은 하노이 중심가에서 의회를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기념관을 짓고 그 안에 시신을 영구 보존했다. 후대 정치인들이 호찌민의 유지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베트남은 이제 더는 ‘슬픈 열대’가 아니고 묵념해야 할 땅이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80리를 덮는다(首陽山陰江東八十里)는 말처럼 베트남 어디를 가도 호찌민의 유훈이 흐른다. 이런 지도자를 둔 나라가 부럽다. 저 선량한 눈망울로 어찌 그리 혹독한 삶을 이겨냈을까. 퇴임하면 예외 없이 ‘아방궁’ 지을 생각하는 나라 지도자와는 많이 다르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호찌민 유산 베트남 하노이 베트남 초대 베트남 국민

2024-02-11

[신 영웅전] 김옥균을 위해 몸을 던진 여인

한말의 정객 김옥균(1851~1894)은 명문가 출신으로 인물 좋고 온갖 재주도 타고났다. 서예는 망명지에서 글씨를 팔아 생활할 정도로 뛰어났다. 1886~1887년 태평양의 절해고도 오가사와라(小笠原) 섬 유배 시절 일본의 바둑 최고수 본인방(本因坊) 슈에이(秀榮·1852~1907)가 바둑판을 메고 방문해 네 점을 두고 대국했을 정도로 바둑에도 능했다. 그는 대인관계도 폭이 넓었으나 훌륭한 참모를 만날 인연은 없었다.   김옥균이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에서 낭인으로 생활할 때 일본이 보기엔 이미 용도 폐기된 인물이었다. 고종이 자객을 네 명이나 보냈고,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파의 정적 리훙장이 절치부심하고 있었으니 그의 죽음은 시간문제였다. 그렇다고 일본은 당시 우익적 분위기에서 그를 죽일 수도 없어 1888~1890년엔 홋카이도로 유배 보냈다.   그때 김옥균에게 다마(玉)라는 한 여인이 있었다. 절세미인도 아니었고 명문가의 딸도 아니었다. 야망을 품었거나 무슨 계산을 하지도 않은 평범한 여인이었다. 숭모하는 사이라 해서 살을 대는 깊은 관계도 아니었다. 그저 곁에서 김옥균을 도왔다. 홋카이도로 유배되자 다마도 따라가 그림자처럼 김옥균을 돌봤다. 그런데 김옥균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한 자객이 따라붙고 있었다. 대단한 야심이나 이념 없이 그저 공명심에 들뜬 무명의 낭인(浪人)이었다.   다마는 김옥균을 죽일 기회를 엿보던 낭인에게 접근해 몸을 허락했다. 다마는 어느 날 잠자리에서 그 자객을 죽이고 사라진 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김옥균은 아무런 영문도 몰랐으나 이 이야기는 이후 낭인의 죽음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만약 김옥균이 재기했더라면 이 사건은 큰 이야깃거리가 됐겠지만, 김옥균은 6년이 지나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에게 피살돼 기구한 삶을 마쳤다. 살면서 이런 연정을 만난 적 있으신지.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김옥균 여인 정객 김옥균 그때 김옥균 자객 홍종우

2024-01-28

[신 영웅전] 딘 러스크 국무장관

공직자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면 나는 딘 러스크(1909~1994) 미국 국무장관의 사례를 든다. 러스크는 1931년부터 4년간 로즈 장학생으로 선발돼 옥스퍼드대에서 철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수업이 시작되기 15~20분 전 미리 교실에 들어가 교수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별명이 엘리야였던 그는 한때 목사가 되고 싶었다. 졸업식에서 ‘세실(Cecil) 평화상’을 받은 그는 귀국해 밀스 칼리지에서 교수로 근무했다. 스스로 수재라는 자부심을 품던 로즈 장학생은 박사학위 논문을 쓰지 않고 글에 각주를 달지 않았다. “우리는 남의 글을 읽고 그를 참고해 쓰는 것이 아니어서 우리의 주장이 곧 학설이다.” 그들은 괴벽스럽고 까칠한 인물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스크는 1940년에 대위로 다시 입대해 인도-미얀마-중국 전구에서 복무하다가 전쟁성으로 전보됐다. 거기서 정보국을 창설하고, 작전국 참모과장으로 활약했다. 이때 윗선으로부터 “인도차이나 반도가 중국 북쪽에 있는지 남쪽에 있는지 알아보는 정도의 일을 했다”고 회고록('As I Saw It', 1990년)에서 투덜거렸다.   러스크는 한국전쟁 뒤에 록펠러 재단 이사장으로 근무하다가 봉급이 25분의 1로 깎이는 것을 감수하면서 국무장관에 발탁됐다. 1961년부터 1969년까지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대통령 행정부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직업’을 즐겼다. 국무장관 재임 중에도 동네 세탁소에 가서 아줌마들과 25센트 동전을 넣으며 세탁했다.   은퇴할 때는 소득세 신고 자료와 지인들의 연락처가 담긴 수첩만 들고나왔다. 정계를 은퇴한 뒤에는 조지아대에서 강의했다.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은 살아남아 자식들을 돌봐야 한다면서 평생 아내와 한 비행기를 타지 않을 만큼 섬세한 사람이었다. 큰일을 하다 보면 가정에 소홀하다는 말도 괜한 소리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국무장관 러스크 러스크 국무장관 로즈 장학생 인도차이나 반도

20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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